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이먼 데 벌레라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[[아일랜드 내전]] 문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전반적으로 정치적, 사회적인 판세를 읽는데 서툴렀다. 그래서인지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[[마이클 콜린스(정치인)|마이클 콜린스]]의 평가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는 것과 비교해서 데 벌레라는 점점 역사가들에게 박한 평가를 받고 있다. 어떤 역사가는 아예 '데 벌레라는 공보다 과가 더 많은 인물이다!'라고 단죄해버리기도. ~~공칠과삼이 아니라 공삼과칠인건가~~ 데 벌레라도 나중에 영국-아일랜드 조약에 반대한 것을 후회하는 등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. 아일랜드인답게 독실한 [[가톨릭]] 신자였다. 1937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선포한 헌법 내용에 아예 이혼 금지 조항을 포함했을 정도.[* 이 이혼 금지법은 1996년에나 이르러서야 폐지된다.] 그렇지만 32-48년 총리 재임 시절 일부에서 제기되었던 성 패트릭 대성당 몰수 주장에 반대하고 가톨릭교회의 아일랜드 공식 국교 지정을 반대했으며 소수 종파에 관용적 태도를 견지하는 등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다.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다고는 해도 공식 석상에서 가톨릭교회를 우대하는 등 편향이 있었고 그의 총리 재임 시절 가톨릭교회와의 정교유착은 더 긴밀해졌다. 그의 총리 재임 시절 가톨릭교회는 아일랜드의 준(準) [[국교]]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. 어쨌든 데 벌레라의 가톨릭 신앙심은 [[바티칸]]에서도 인정받아서, 37년에는 교황 비오 12세가 파견한 교황사절이 300여 년 만에 아일랜드를 방문했으며, 62년에는 교황 [[요한 23세]]에게 그리스도 훈장을 수여받았다. 64년에는 당시 가톨릭교회 내 보수파 유명 인사였던 [[마르셀 르페브르]] 대주교와도 만났다. 오늘날 아일랜드 내에서 사제들의 각종 성추문이 터지고 가톨릭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'이게 다 데 벌레라가 가톨릭을 싸고돌아서다!'라고 까일 때가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